1장 — 회상의 불꽃 (폭동의 밤)


잿빛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서울. 도로는 숨 막힌 폐처럼 회색이었고,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머리 위를 뒤덮은 하늘에도 같은 색의 절망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질식할 듯한 회색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치 썩은 상처 위에 핀 독버섯처럼.

윤박사는 소독약 냄새가 배어나는 병실 창가에 기대섰다. 유리창 너머로 검붉은 연기 기둥이 밤하늘을 더럽히고 있었다. 데자뷔. 그는 이미 저 불꽃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나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그때도 모든 것은 이런 식이었다.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변두리 공장 하나.

공장주 박정규. 그는 작업복 대신 기름때를 걸친 이들을 숫자로만 봤다. ‘노동력’. 그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기계 앞에 서서 해가 진 뒤에도 기름 냄새 속에 몸을 섞었다. 열네 시간, 혹은 그 이상.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달력의 휴일은 희미한 전설이 된 지 오래였다. 손에 쥐어지는 돈은 싸구려 술 한 병 값에도 못 미쳤고, 등 뒤에는 늘 욕설과 발길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사내가 있었다. 그는 작업대 위에 놓인 육중한 망치를 들어 올렸다. 둔탁한 소리가 공장 안에 울려 퍼졌고, 쇳가루 날리던 공기 중에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들었다. 비명은 없었다. 잠시, 기계 소리마저 멎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첫 불씨가 당겨졌다.

누군가 박정규의 호화로운 사무실 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다. 다른 누군가는 쇠사슬로 두꺼운 철문을 칭칭 감아 출입구를 봉쇄했다. 안에서 터져 나온 절규는 맹렬한 화염에 묻혔다. 다음 날 아침,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까만 덩어리뿐이었다.

그 순간,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하나의 함성으로 터져 나왔다. 이민자 구역에는 "우리가 놈을 해치웠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우리가 이겼다!" 누군가는 작업장에서 훔쳐 온 횃불을 치켜들었고, 누군가는 녹슨 철근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그저 성난 군중의 행렬이었다. 그러나 곧,

이름 모를 극단주의자 하나가 낡은 권총 한 자루를 들고 파출소 유리창을 깼다. 방아쇠는 망설임 없이 당겨졌다. 총성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젊은 순경 하나가 가슴을 움켜쥐고 힘없이 쓰러졌다.

그 한 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작은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산불로 타올랐다.

정부는 지체 없이 진압군을 투입했다. 육중한 장갑차와 물대포가 거리를 메웠고, 고무탄과 실탄이 밤하늘을 갈랐다. 군경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높은 방어벽을 세웠다. 저항자들은 깨진 보도블록 조각과 돌멩이를 던지며 맞섰다. 돌멩이가 방어벽 너머로 날아가자, 쇳덩어리가 빗발처럼 되돌아왔다.

그들의 리더, 카디르. 그는 부서진 바리케이드 잔해 위에, 광화문 언덕 꼭대기에 버티고 섰다. 그의 발밑 아스팔트는 이미 동지들의 피로 번들거렸고, 주변에는 쓰러진 이들의 신음만이 낮게 깔렸다. 그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마이크를 다시 움켜쥐었다. 몇 남지 않은,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눈동자들을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한 마디를 뱉어내려 했다.

“우린 싸웠다. 우린… 끝까지…”

총성은 그의 말을 삼켰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허공으로 꺾였다. 마이크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광장에 메아리쳤다. 잠시의 울림 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의 끝이었다.

그 모든 잔혹한 장면들이 지금, 윤박사의 눈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검은 연기를 응시했다. 과거의 연기와 현재의 연기가 그의 망막 위에서 흐릿하게 겹쳐졌다.

그때, 정부는 냉혹한 결론을 내렸다. “이민자들은 위험하다. 통제해야 한다.” “이런 비극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한다.”

그래서 윤박사는 지금 이곳, 하얀 가운을 입고 하얀 접종실에 서 있었다. 차가운 금속 트레이 위에는 은색 액체가 담긴 주사기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스물두 번째 주사기. 벽에 걸린 차트에는 'NERA'라는 딱딱한 약자가 적혀 있었다. ‘신경 강화 및 행동 조절 알고리즘’. 참으로 거창하고도 공허한 이름이었다. 모든 비극과 광기의 종착역이 될, 혹은 새로운 시작점이 될 이름. 그 이름은 바로 그날 시작되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대상의 팔뚝에 꽂았다. 은색 나노봇이 혈관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차가운 액체가 뜨거운 피와 섞여드는 순간.

창밖에서 또 다른 불꽃이 터져 올랐다. 이번에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새로운 폭동의 서막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다.

윤박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뒤틀린 경련에 가까웠다. 폐부를 긁는 듯한 낮은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결국, 또다시 시작되는군.”

그는 창문을 닫았다. 어른거리는 불빛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인공적인 불빛과 소독약 냄새만이 남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NERA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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