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땅 (Land of Schism) : 프롤로그

 실험실 불빛은 수술실 조명처럼 차갑고, 모든 것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윤 박사는 홀로 앉아 있었다. 모니터 속에는 인간 뇌의 복잡한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수천 개의 빛점(나노봇)이 유영했다. 그는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었다. 아니, 이미 넘었는지도 몰랐다.

IE 시스템. 그의 모든 것이었다. 한때는 인류의 축복이라 믿었다. 조현병 환자의 망가진 현실 감각을 바로잡고, 분노 조절 장애 환자의 폭력 충동을 잠재웠다. 치매 노인의 텅 빈 눈에, 가족들이 간절히 원했던 ‘기억’을 AI로 만들어 다운로드해주기도 했다. 그는 그것이 ‘치료’라고 믿었다.

하지만 코드에는 언제나 버그가 숨어 있는 법. ‘람’의 아버지가 그 증거였다. 분노 조절 치료 중 폭주. 아내를 살해하고, 스스로 파멸했다. 시스템 오류. 윤 박사의 코드가 살인 무기가 된 순간이었다. 언론은 그의 이름을 ‘위험한 과학자’로 낙인찍었다.

죄책감 속에서도 그는 연구를 계속했다. 아직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으니까. 식탁 위에 놓인 딸아이의 서툰 쪽지가 그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악의는 그의 마지막 온기마저 집어삼켰다. 그의 집은 불탔고, 가족은 재가 되었다. 범인은 이민자 무리였다. 그의 연구와는 상관없는, 무작위적인 폭력.

그의 기술이 초래한 비극과 세상의 무차별적인 악의. 두 개의 어둠이 그의 영혼 속에서 하나로 뒤엉켰다. 선의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통제에 대한 갈망뿐이었다.

장례식에 찾아온 정부 인사들은 그의 상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감입니다, 박사님. 하지만 이건 국가적 위기입니다.” 그들은 서류를 내밀었다. “이 기술이 필요합니다. 치료가 아니라, 통제를 위해.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어야 합니다.”

윤 박사는 펜을 들었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죄책감과 상실감은 이미 차가운 강철 같은 결의로 굳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연구는 국가의 것이 되었다.

국가 정체성 통제법 (NERA - National Ethnic Regulation Act). 그럴듯한 이름 뒤에는 섬뜩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폭증하는 이민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거리에는 낯선 언어와 얼굴들이 넘쳐났고, 사회는 균열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단순한 관리나 감시가 아닌, 더 확실한 것.

그들이 윤 박사의 IE 시스템에서 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정체성의 완전한 삭제와 재구축. 밀려드는 이방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들의 과거, 기억, 언어, 문화적 뿌리를 나노봇으로 지워버리는 것. 그리고 그 백지 위에, 국가가 원하는 새로운 인격, 새로운 기억, 새로운 충성심을 다운로드하는 것. 마치 컴퓨터를 포맷하고 새로운 운영체제를 설치하듯. 그것이 NERA의 진짜 얼굴이었고, IE 시스템의 최종 목적지였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이질적인 존재는 없도록. 모두가 예측 가능하고, 순응적인 ‘국민’이 되도록.

그리고 윤 박사는, 모든 것을 잃고 통제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이 거대한 계획에 동조했다. 아니,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알고리즘을 정교화했고, 디지털 세뇌를 위한 기술적 토대를 마련했다. 혼돈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질서를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다.

연구실의 불빛 아래, 윤 박사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수백만 개의 데이터. 잠재적 ‘정화’ 대상들의 목록. 그는 속삭였다. “그래… 내가 통제한다. 전부 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그때, 화면 한구석에서 이름 하나가 깜빡였다. RAM. 그 끔찍한 오류 코드의 생존자. 그리고 이제, NERA 시스템의 잠재적 대상자일지도 모르는 소년.

그는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봤다. 텅 빈 눈으로. 그의 심연은 이제 너무 깊어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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