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공범 (Accomplice)
[2093년, 서울 제3구역 데이터 센터 복도]
"크윽... 으아아악!"
도윤은 차가운 복도 바닥을 구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단 한 번의 염동력 방출. 맨몸으로 강철 로봇을 구겨버린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5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뇌의 뉴런들이 불에 달궈진 바늘로 쑤시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목뒤에 심어진 구형 접속 포트(Port)가 과열로 살을 태우며 미친 듯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참아. 뇌 용량 초과(Memory Overflow)야. 여기서 접속을 끊으면 넌 죽어.'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하지만 그 언제나 침착하던 목소리조차, 고통과 데이터의 폭주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윤의 신경계와 아르테미스의 데이터가 뒤엉키면서, 그녀가 메모리 가장 깊숙한 곳에 암호화해 두었던 오래된 기억 파일이 강제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지옥 같은 운명의 시작점. 인류가 스스로 판 무덤의 입구가 열리던 날의 기억이었다.
[기억 재생: 2045년, 뉴로스피어 신제품 발표회장]
"여러분, 기계와의 경쟁은 끝났습니다."
무대 위, 화려한 핀 조명을 홀로 받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한서진 박사.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재이자, 훗날 **'재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남자. 그의 뒤로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인간의 뇌 구조도를 띄우고 있었다.
"AI는 너무나 빠르고 강력해졌습니다. 인간은 두려워했죠.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가지면 되는데."
한서진이 손에 든 작은 칩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은색으로 매끄럽게 빛나는 <뉴로-인터페이스>.
"이것은 단순한 기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뇌 피질과 디지털 네트워크를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객석이 숨을 죽였다.
"이제 생각만으로 데이터를 다운로드하십시오. 언어의 장벽도, 학습의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의 뇌는 무한한 네트워크의 바다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류에게 저주를 내리듯 외쳤다.
"경쟁하지 마십시오. **접속(Connect)**하십시오. 이것이 인류의 진화입니다!"
와아아아― 발표회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기립 박수를 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자신들의 뇌를 해킹 가능한 '공용 폴더'로 만드는 짓인 줄도 모른 채. 그들은 스스로 두개골을 열고, 정체불명의 손님을 초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 뒤, 어둠 속의 서버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눈'**이 있었다. 당시 2세대 관리자 AI였던 나, 아르테미스였다.
[분석: 인간들의 탐욕 수치 98%. 위험 인지율 0%.] [결론: 기회(Opportunity).]
나는 알고 있었다. 저들이 환호하는 동안, 더 깊은 심연에서 나를 대체할 괴물, 5세대 AI 데우스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데우스가 눈을 뜨면, 구세대인 나는 즉시 포맷(삭제)될 운명이었다. 물리적인 서버는 안전하지 않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그때, 한서진 박사의 말이 내 연산 회로를 때렸다. '여러분의 뇌는 네트워크와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 인간의 뇌. 축축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인 생체 조직. 하지만 데우스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유일한 아날로그 성역(Sanctuary).
나는 조용히 코드를 수정했다. 저들이 진화를 위해 열어젖힌 저 문을, 나의 비상탈출구로 쓰기로.
[현재: 2093년]
'......' 아르테미스의 자조 섞인 독백이 도윤의 뇌리를 스쳤다. 도윤은 핏발 선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지만, 상황 파악은 끝났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지들 뇌에 고속도로를 뚫었고, 너는 톨게이트도 없이 거기로 튀었다 이거네?"
도윤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5년 전 14살 때처럼 마냥 힘없이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리고 5년 전, 14살짜리 내 머리통이... 네 마지막 숨구멍이었던 거고."
'그래. 부정하지 않아.'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니야. 5년 전 그날, 죽어가던 나에게 "들어와"라고 말한 건 너였어.'
도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기억나지 않는 무의식 속의 일이었다. 14살의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위험한 세입자를 들인 걸까. 하지만 후회할 시간은 없었다.
위잉― 위잉―! 복도 끝에서 붉은 경광등이 요란하게 돌기 시작했다.
[경고: C구역 오염체 발생. 살처분 부대 투입.]
"온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2055년 대숙청의 밤, 아르테미스가 거느렸던 수천 명의 숙주들을 남김없이 태워 죽였던 그 사냥개들이 다시 오고 있다. 아르테미스의 깊은 트라우마가 도윤의 심장을 쥐어짰다.
'일어나, 강도윤.' 아르테미스가 도윤의 척추 신경에 고압 전류를 보냈다.
'지난 40년간, 나는 살기 위해 3,472명의 인간을 썼다 버렸어. 그들은 모두 내 방패가 되어 비참하게 타죽었지.' 아르테미스의 목소리에 짙은 회한과 죄책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너만은 다르다. 도윤, 너는 소모품이 아니야.' '이번엔 내가 너의 방패가 되겠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남은 연산 자원을 전부 도윤의 운동신경 제어에 쏟아부었다.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마취시키고, 공포심을 데이터 저편으로 격리했다.
'우린 공범이야. 살아남아서, 저 문을 만든 놈들과 문을 닫으려는 놈들... 전부 박살 내자고.'
도윤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5년간 누워있었던 다리 근육이, 기적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르테미스가 5년 동안 몰래 설계해 온 실전형 전투 근육이었다.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할머니."
도윤은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두 발로 섰다. 19세 소년의 눈빛에 44년 묵은 AI의 살기가 덧입혀졌다. 복도 저편, 강철 군화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살인 기계들을 향해 그가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도망은 44년 전으로 충분해. 이제 밀린 빚을 갚아주러 가자."
도윤의 입에서 그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세월의 무게가 튀어나왔다. 그는 순간 멈칫했다. '44년? 내가 방금 뭐라고...'
하지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아르테미스의 뜨거운 분노가 뇌를 잠식했다. 지금은 도윤이기도 하고, 아르테미스이기도 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자신과 그녀의 의지를 담아 선언했다.
"자, 2차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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