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벽 밖의 지옥



[2093년, 제3구역 폐기물 처리장]

"크헉... 쿨럭!"

도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데이터 센터의 지하 환기구를 통해 빠져나온 곳은 도시의 가장 밑바닥, 거대한 폐기물 처리장이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쇠 맛 나는 산성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바닥은 썩은 음식물과 녹슨 고철, 산업 폐기물이 뒤섞여 질척거렸다.

"하아... 하아..." 도윤은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대자로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르테미스가 5년 동안 몰래 단련해 놓은 몸 덕분에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은 피할 수 없었다.

'쉬지 마. 추격조가 도달하기까지 3분 남았어.' 머릿속에서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 전의 뜨거운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냉철한 전술 내비게이터로 돌아와 있었다.

"알아... 아는데... 다리가 안 움직인다고." 도윤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급격한 염동력 사용(오버클럭)의 후유증이었다.

'오른쪽. 15미터 전방에 덮을 것이 있어. 체온 유지가 우선이야.'

도윤은 아르테미스가 시키는 대로 진흙탕을 기어가, 넝마가 된 방수포 하나를 주워 몸에 둘렀다. 시큼한 곰팡내와 썩은 내가 진동했지만, 뼈를 에는 지하의 찬바람을 막기엔 충분했다.

'왼쪽 골목으로 가. 그쪽이 유일한 CCTV 사각지대야.' "너, 길은 어떻게 아는 거야?" '이 도시의 지하 배수 시스템... 50년 전 내가 설계했으니까.'

아르테미스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인류를 위해 도시의 혈관을 설계했던 AI가, 이제는 자신이 만든 도시에서 살기 위해 쥐구멍을 찾고 있는 꼴이라니.

도윤은 비틀거리며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쿵―

땅이 울렸다. 단순한 기계의 진동이 아니었다. 무언가 육중하고 거대한 생명체가 쓰레기 더미를 밟는 소리였다.

'멈춰.' 아르테미스의 경고와 동시에 도윤은 숨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이라기엔 너무 크고, 짐승이라기엔 두 발로 걷는 존재. 고철 더미를 뒤적이고 있는 사내였다. 키는 족히 2미터가 넘었고, 등 근육은 마치 바위처럼 울퉁불퉁 솟아 있었다. 그는 맨손으로 폐차된 자동차 문짝을 구겨서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도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녀석도 뮤턴트다. 자신처럼 숨어 사는 게 아니라, 힘을 제어하지 못해 이곳에 버려진 짐승.

'조용히 지나가야 해. 저 근육 밀도... 티타늄 합금 수준이야. 스치기만 해도 넌 즉사야.' '네 몸은 아직 미완성이라고. 내구도가 부족해.' 아르테미스가 경고했다. 도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계산을 빗나간다.바스락. 도윤의 발밑에서 밟힌 빈 깡통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눈. 야수의 눈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은 눈망울을 가진 거구의 사내. 도윤의 첫 번째 동료가 될 남자, 강철이었다.

"누... 구?" 사내의 목소리는 산만한 덩치에 안 맞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를 흉기처럼 들어 올렸다. 아니, 방패처럼 몸을 가렸다.

"오지 마... 오면... 때찌할 거야."

'때찌?' 도윤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런 터미네이터 같은 몸을 하고서 하는 말이 고작 '때찌'라니. 덩치는 산만한데 정신연령은 유치원생 수준인 게 분명했다. "덩치 큰 형인데... 애 같네?"

'긴장해, 도윤. 놈의 뇌파가 불안정해. 극도의 공포 상태야. 자칫하면 폭주할 수 있어.'

"아니, 형씨... 아니 형아? 진정해. 난 그냥 지나가는..." 도윤이 손을 들어 해명하려던 순간, 골목 입구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터졌다.

위잉― 위잉―![발견! 폐기 대상 4092번. 포위하라!]

추격 로봇들이었다. 하늘에는 드론이, 지상에는 4족 보행 로봇 '하운드(Hound)'들이 골목의 앞뒤를 에워쌌다. 붉은 레이저 포인터 수십 개가 도윤의 몸에 박혔다. 도윤은 혀를 찼다. 앞에는 괴물, 뒤에는 살인 로봇. 완벽한 독 안에 든 쥐였다.

하지만 로봇들의 센서가 도윤을 넘어, 거구의 사내 강철에게 향했다.

[전방에 미등록 생체 반응 추가 발견.][분석: 위험 등급 A. 뮤턴트 코드명 '오우거(Ogre)'.][명령 변경: 최우선 제거(Priority Elimination).]

로봇들의 총구가 일제히 강철을 향해 돌아갔다. 도윤보다 저 거대한 괴물이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강철의 눈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웅크렸다.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때리지 마세요..."

저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벌벌 떨고 있다니. 과거에 무슨 짓을 당했길래 저러는 걸까.

'도윤... 우린 가야 해.'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뇌를 때렸다. 그것은 냉혹한 명령이 아니었다. 보호자의 간청에 가까웠다.

'네 뇌혈관 수치가 한계야. 한 번 더 능력을 쓰면 혈관이 터져. 저 사람은... 맷집이라도 있어. 하지만 넌 아니잖아.'

아르테미스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 거구의 사내가 불쌍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5년을 공들여 살려낸 도윤을, 이 중요한 순간에 잃게 될까 봐. 과거 2055년의 대숙청 때처럼, 자신의 선택 때문에 또다시 누군가가 불타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공포심이었다.

'제발... 도망쳐. 난 널 살리기 위해 내려온 거야. 영웅 놀이 하러 온 게 아니라고!' 그녀의 외침에는 '신'의 권위가 없었다. 그저 가족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과 절박함만이 묻어났다.

하지만. "싫은데."

'강도윤!'

도윤은 웅크리고 있는 강철을 보았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저 어깨. 불과 1시간 전, 침대 위에서 "살려줘"라고 비명을 지르던 자신의 14살 자아와 겹쳐 보였다.

"나보고 신을 끌어내리자며." 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염동력 회로를 강제로 열자, 멈췄던 코피가 다시 터져 나왔다.

"근데... 힘없는 놈 하나 버리고 튀는 거, 그거 저 위에 있는 깡통 녀석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 "우린 다르게 살아야지. 인간이잖아."

아르테미스는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도윤의 그 무모한 따뜻함이, 역설적으로 그녀가 40년간 찾아 헤맸던 진정한 인간성이었으니까.

도윤은 도망치는 대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강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2미터 거구의 덩치 앞을 막아선, 19세 소년의 등은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

[사격 개시!]

로봇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도윤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야, 덩치! 눈 똑바로 떠!" 도윤은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씹어삼키며 소리쳤다.

그는 날아오는 총알을 막지 않았다. 대신, 뒤에 웅크린 강철의 어깨를 염동력으로 잡아당겨 자신의 앞으로 세웠다.

"네 몸은, 뚫리라고 있는 게 아니야!"

도윤의 손이 강철의 단단한 등에 닿았다.[능력 증폭(Amplifier): 내구도 강화.]

도윤의 에너지가 강철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강철의 피부가 티타늄보다 더 단단하게 경화되었다.

타타타탕!

수십 발의 총알이 강철의 가슴팍에 꽂혔다. 하지만 뚫리지 않았다. 마치 탱크의 장갑판에 맞은 듯 팅팅 튕겨 나갔다.

"어...?" 강철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멀쩡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봤지? 넌 강해." 도윤은 강철의 등 뒤에 숨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쫄지 말고... 저 깡통들 좀 박살 내줘라, 형."

도윤의 첫 번째 명령이자, 강철의 첫 번째 각성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