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껍데기의 무게
[2093년, 제3구역 폐기물 처리장 - 전투 직후]
치이익-
타버린 금속과 빗물이 만나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골목을 채웠다. 조금 전까지 살기로 번뜩이던 살인 기계들은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후우... 후우..."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강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 톤의 고철 갑옷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능력이 해제되자, 그 안에 있던 2미터 거구의 사내는 다시금 어깨를 잔뜩 움츠린 겁쟁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투박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부순 거야? 진짜로?"
"그래... 네가 다 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철이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도윤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갓 깨어난 몸으로 염동력을 과하게 쓴 탓에, 눈과 코, 귀에서 칠공분혈하듯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혀, 형!"
강철이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와 도윤을 부축했다.
"피... 피가 너무 많이 나! 어떡해? 내가... 내가 때찌해줄까? 누구한테?"
"아니... 넌 좀 가만히 있어. 머리 울리니까."
도윤은 강철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세상이 핑 돌았다.
'도윤, 우측 전두엽 과부하야. 당장 휴식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뇌 손상이 올 수 있어.'
아르테미스의 경고가 들려왔지만, 도윤은 무시했다. 지금 여기서 쓰러지면 둘 다 죽은 목숨이다.
"이봐, 덩치. 이름이 뭐냐?"
"강... 철. 엄마가 강하게 크라고 지어줬어."
"이름값 제대로 하네."
도윤은 피 묻은 손으로 강철의 단단한 팔뚝을 툭 쳤다.
"나는 강도윤이다. 그리고...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그 말에 강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평생 '괴물', '밥버러지', '실수'라는 말만 듣고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강철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으아앙! 형! 죽지 마! 나 형 좋아!"
"아, 시끄러! 안 죽어! 업어, 튀어야 해!"
[제3구역 지하, 폐쇄된 지하철역 '을지로']
아르테미스가 안내한 비밀 통로를 통해 도착한 곳은, 수십 년 전 폐쇄된 지하철 역사였다. 먼지 쌓인 개찰구와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가 거대한 짐승의 뼈처럼 남아 있었다.
"여기... 냄새나."
"참아. 냄새가 난다는 건, 청소 로봇도 안 온다는 뜻이니까."
도윤은 강철의 등에서 내려와, 역무실 구석의 낡은 자판기를 밀어냈다. 드러난 보안 패널에 손을 얹자, 육중한 철문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르테미스가 44년 전 마련해둔 **'안전가옥(Safe House)'**이었다. 먼지 쌓인 소파, 낡은 통조림 박스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구형 서버들.
"우와... 여기 우리 집이야?"
강철이 눈을 반짝이며 소파로 뛰어들었다. 도윤은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온몸에 눌러붙은 피와 오물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촤아아-
녹슨 수도꼭지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도윤은 망설임 없이 피에 젖은 환자복 상의를 훌렁 벗어 던졌다.
"으아악! 형! 뭐, 뭐 하는 거야!"
강철의 비명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괴물 로봇 앞에서도 덤비던 녀석이, 지금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뭐 하긴. 씻잖아."
"그, 그치만! 형은... 여자잖아! 엄마가 남녀는 유별나다고 했어! 찌찌도 있고!"
도윤은 무심하게 비누칠을 하며 대꾸했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는 앙상한 몸이었지만, 그 곡선은 분명히 여자의 것이었다.
"찌찌는 너도 있어, 인마. 그리고 형이면 어떻고 누나면 어때. 총알 막아주면 형이지."
"그, 그래도... 부끄럽잖아..."
강철은 벽을 보고 돌아앉아 웅얼거렸다. 순진해 빠진 녀석. 도윤은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깨진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10년간 멈춰있던, 핏기 없는 창백한 여자의 얼굴.
'도윤, 수치심(Shame)이라는 감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프로토콜이야. 넌 지금 그게 결여되어 있어.'
아르테미스가 분석적인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지금 네 행동, 인간의 기준으로는 비상식적이야.'
도윤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대답했다.
'웃기지 마. 10년 동안 병실에 누워 있어 봐.'
'......'
'간호사들이 내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갈고, 몸을 닦을 때... 내가 여자로 보였을 것 같아? 아니, 그냥 숨 쉬는 고깃덩어리 4092번이었어.'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10년. 그녀에게 육체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영혼을 가두는 지겨운 감옥이자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누가 본다고 부끄러울 리가.
"야, 강철."
도윤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구석에 있던 헐렁한 남자 셔츠를 걸쳐 입으며 불렀다.
"네가 날 형이라고 부르든, 누나라고 부르든, 4092번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도윤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강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성별 따위는 뛰어넘은, 압도적인 리더의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중요한 건 딱 하나야."
"뭔... 데?"
"내가 너한테 살길을 알려준다는 거. 그리고 네가 내 뒤를 지킨다는 거."
도윤은 강철의 떡 벌어진 어깨를 툭 쳤다.
"그거면 됐지? 밥이나 먹자."
강철은 멍하니 도윤을 바라보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여전히 헷갈렸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사람은 **'대장'**이다.
"응! 형! 나 배고파!"
강철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헤실헤실 웃으며 통조림을 땄다. 도윤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네받은 콩 통조림을 씹었다. 비릿했지만, 10년 만에 씹어보는 '고체'의 맛이었다.
'수고했어, 강도윤.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어.'
머릿속에서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률만 따지다가 널 비겁하게 만들 뻔했네.'
"됐어. 신이든 기계든... 잃을 게 있으면 겁쟁이가 되는 법이야. 나도 그렇고."
도윤은 피곤한 눈을 감았다. 차가운 서버실이 아닌, 곰팡내 나는 지하 단칸방. 옆에는 코를 고는 괴물, 머릿속에는 잔소리하는 AI.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도윤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신을 죽일 반란군의 첫 번째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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