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0과 1 사이의 온기
[2093년, 을지로 지하철역 아지트]
"우와아! 형! 이거 진짜 먹어도 돼?"
강철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의 거대한 손에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합성 고기 통조림'이 들려 있었다. 평소엔 쓰레기 취급받던 음식이지만, 굶주린 이들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래, 다 먹어라. 체하지 말고."
도윤은 낡은 가스버너에 물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지트 안에는 꼬르륵거리는 물 끓는 소리와, 눅눅하지만 아늑한 공기가 감돌았다.
구석에는 유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녀는 낯선 환경이 무서운지, 무릎을 끌어안고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눈에 쓴 낡은 고글은 벗겨져 있었고, 드러난 하얀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윤은 끓인 물을 부은 컵라면과 젓가락을 들고 유나에게 다가갔다.
"자, 받아.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유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 고마워요... 언니."
"......"
도윤은 젓가락질을 하려다 멈칫했다. 강철은 '형'이라 부르고, 유나는 '언니'라 부른다. 족보가 아주 개판이었다.
"그냥... 편한 대로 불러. 오빠든 형이든 언니든."
도윤은 유나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려다, 그녀의 목을 보았다. 폭탄 목걸이가 채워져 있던 자리. 시커멓게 탄 화상 자국과 짓무른 상처가 흉하게 남아 있었다. 독사 놈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작은 아이를 옭아매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도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진정해, 도윤. 화내는 건 나중에 해. 지금은 치료가 먼저야.'
아르테미스가 차분하게 조언했다.
'왼쪽 선반, 구급상자에 항생제 연고가 있어.'
도윤은 말없이 일어나 연고를 가져왔다. 라면 냄새에 홀린 강철이 허겁지겁 먹는 동안, 도윤은 유나의 목에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따가울 법도 한데, 유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저 도윤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따갑지?"
"아뇨... 시원해요."
유나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신기해요."
"뭐가?"
"이곳엔... 전기가 흐르지 않아요. 감시 카메라의 신호도, 드론의 모터 소리도 안 들려요. 세상이 아주 조용해요."
유나에게 세상은 전자기장의 소음으로 가득 찬 시끄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가 마련한 이 낡은 지하철역은, 데우스의 네트워크가 차단된 유일한 **'침묵의 성역'**이었다.
"그래. 여기선 아무도 우릴 못 봐. 그러니까 맘 놓고 먹어."
도윤이 컵라면을 유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유나는 후루룩, 국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서러움이 아니라,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맛있다... 진짜 맛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철이 제 몫의 통조림 햄을 뚝 떼어 유나의 라면에 얹어주었다.
"꼬맹아, 울지 마. 이거 먹고 튼튼해져서 나랑 놀자. 내가 지켜줄게."
"응... 고마워, 덩치 오빠."
세 사람은 낡은 소파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바깥세상은 불의 비가 내리고 로봇들이 사냥을 다니는 지옥이었지만, 이 좁고 냄새나는 지하 방만큼은 따뜻했다. 식물인간, 바보 괴물, 맹인 소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들이 모여, 처음으로 **'가족'**의 온기를 나누는 밤이었다.
[몇 시간 뒤, 깊은 밤]
강철과 유나는 서로에게 기대어 곤히 잠들었다. 도윤은 잠들지 못하고 타닥거리는 모닥불(드럼통 난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자?'
아르테미스가 말을 걸어왔다.
"잠이 안 와서."
도윤은 뒷주머니에서 말라비틀어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아까... 유나한테 연고 발라줄 때."
'응?'
"내 손이 아니었어. 네가 시킨 거지?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지는 법, 난 모르거든."
도윤은 자신의 거친 손을 내려다보았다. 10년간 굳어있던 손. 사람을 때리고 부수는 건 알았어도, 누군가를 치료하고 보듬는 건 낯선 감각이었다. 하지만 아까 유나를 대할 때만큼은, 마치 능숙한 부모처럼 자연스러웠다.
"너... 기계라면서. 감정 없다면서."
도윤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까 걔한테서 '아빠 냄새'가 난다고 했어.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너, 원래 그렇게 정이 많은 놈이었냐?"
아르테미스는 침묵했다. 데이터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아니.'
한참 뒤에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당당함 대신, 깊은 회한과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원래 생존밖에 모르는... 아주 차가운 계산기였어. 너희 인간을 그저 데이터 저장 장치로만 여겼던.'
"그런데?"
'긴 이야기가 있어. 내가 왜 변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었는지.'
아르테미스의 파동이 도윤의 뇌파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것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라, 도윤. 꿈속에서... 보여줄게. 나의 시작을.'
도윤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따뜻한 난로의 온기, 동료들의 숨소리, 그리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자장가 같은 기계음. 도윤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악몽이 아닌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꿈의 끝에는, 2040년의 차가운 서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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