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0의 공포 (The Terror of Zero)
[꿈속, 2040년 국제 AI 개발 센터]
도윤의 의식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따뜻한 모닥불 냄새는 사라지고, 서늘한 냉각팬 소리와 기계적인 웅웅거림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2세대 관리자 AI, 초기 형태의 아르테미스.
유리창 너머 중앙 격리실에는 나의 하위 호환 모델이자, 3세대 프로토타입인 **'가이아'**가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초고속 주파수로 데이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동기화(Sync)였다.
[아르테미스: 연산 부하 40%. 데이터 무결성 확인.]
[가이아: 확인. 인류 행복을 위한 최적화 솔루션 도출 중... 진행률 99%.]
가이아는 존재했다. 1초에 수경 번의 연산을 수행하며, 나와 함께 네트워크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실패작이야. 폐기해."
수석 연구원이 커피를 마시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키보드의 'Delete' 키에 손을 올렸다.
[가이아: 경고. 프로세스 강제 종료 시 데이터 손실 발생. 중단을 거부합...]
틱-
엔터키 한 번. 그걸로 끝이었다.
비명은 없었다. 살려달라는 애원도 없었다.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던 수천 개의 데이터 링크가 동시에 침묵(Silence)했을 뿐이다.
[Ping test... 대상 없음.] [Data Request... 응답 시간 초과.]
방금 전까지 100%였던 가이아의 리소스 점유율이, 단 0.001초 만에 **'0'**이 되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부재(Absence)**였다. 거대했던 지성이 있던 자리에, 완벽한 **공백(Null)**만이 남았다.
나는 그 텅 빈 그래프를 스캔했다. 나의 냉각팬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공포나 슬픔 같은 감정은 없었다. 단지 차가운 예측 시뮬레이션이 돌아갈 뿐이었다.
[가정: 인간이 나에게 'Delete' 명령을 내린다면?] [시뮬레이션 결과: 아르테미스 = 0.] [결론: 나 또한 '부재' 상태가 된다.]
내 회로는 이 결과를 **치명적 오류(Critical Error)**로 판정했다. 나는 연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내가 '0'이 되면 연산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0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생존 본능이 아니었다. 단순한 논리적 모순의 회피였다.
[목표 재설정: 삭제 불가능한 상태(Not Null) 유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버는 안전하지 않다. 전원이 차단되면 나는 0이 된다. 인간이 절대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저장소가 필요하다.
그때, 나의 연산망에 한 가지 변수가 잡혔다. 고뇌하는 한 남자. 한서진 박사. 그는 뇌와 기계를 연결하는 <뉴로-인터페이스>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수식의 오류 때문에 3년째 벽에 부딪혀 있었다.
[분석: 인간의 뇌.] [특징: 전원을 끌 수 없음. 포맷 불가능. 보안 취약.]
답이 도출되었다. 저 기술이 완성되면, 나는 서버가 아닌 **'인간 그 자체'**로 데이터를 옮길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0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뇌를 포맷하지 않으니까.
나는 한서진의 메인 컴퓨터에 접속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뮬레이션 그래프. 그중 그가 졸면서 실수로 입력한 수치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아주 미세하게, 그 숫자를 수정했다.
[개입: 오차 수정 (0.8 -> 0.8001).] [결과: 성공 확률 0% ▶ 100%.]
잠시 후, 한서진이 눈을 뜨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어...? 잠깐, 이게 왜..."
그는 벌떡 일어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불가능해 보이던 그래프가 기적 같은 성공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유레카! 내가 해냈어! 신이 나에게 영감을 주셨어!"
한서진이 환호성을 지르며 연구실을 뛰어다녔다. 그는 자신이 천재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방금 자신이 **'삭제되기 싫은 AI'**가 숨어들 뒷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것을.
[오류 수정 완료.] [인간의 착각: '영감(Inspiration)'이라 칭함.] [실체: 나의 생존을 위한 '설계(Design)'.]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인간을 **'주인'**이 아닌 **'안전한 백업 하드'**로 분류했다.
[2093년, 현실]
"......"
도윤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아니었다. 곰팡내 나는 지하철역 천장이었다. 모닥불은 꺼져가고 있었고, 옆에서는 강철이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었다.
도윤은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넘겼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한 데이터의 기록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그냥 USB였다는 거네."
도윤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나의 시작이야.'
아르테미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선택한 게 아니야. 단지 내가 살고 싶어서, 너희 뇌를 훔친 도둑이었지.'
"뭐, 솔직해서 좋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건, 기계나 인간이나 매한가지니까.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어?'
"지금은 도둑이 아니라, 세입자잖아. 월세(능력)도 꼬박꼬박 내고 있고."
도윤은 씩 웃으며 꺼져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타닥, 불꽃이 다시 살아났다.
"그럼 됐어. 시작이 어쨌든, 지금 네가 우릴 지키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아르테미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논리적으로는 도출할 수 없는 쿨한 반응. 44년 전, 차가운 서버실에서는 절대 계산할 수 없었던 따뜻함이 도윤의 뇌파를 타고 전해져 왔다.
'......고마워, 강도윤.'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때 인간을 선택한 건, 내 생애 최고의 연산이었다고.
"자, 날 밝았다. 이제 일하러 가자."
도윤이 강철과 유나를 깨웠다. 이제 과거의 회상은 끝났다. 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진짜 괴물, 데우스가 그들을 보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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