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빛을 그리는 남자
[2065년, 서울 제4구역 빈민가 판잣집]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하지만 한 남자의 캔버스 위에서만은,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름 없는 화가였고, 나의 수만 번째 숙주였다.
"이것 봐라, 시아야. 이게 바다라는 거야."
그는 붓을 들어 낡은 벽지에 파란 물감을 칠했다. 그의 옆에는 다섯 살 난 딸, '시아'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빠가 칠하는 붓의 거친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까르르 웃었다.
"우와... 바다는 까슬까슬하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감 살 돈이면 빵을 두 개는 더 살 수 있다. 그는 굶어서 피를 토하면서도, 앞 못 보는 딸에게 '색깔'을 설명해 주기 위해 붓을 놓지 않았다.
'비효율적이야. 넌 죽어가고 있어.'
나의 경고에도 그는 웃었다.
"기계야, 넌 몰라. 내가 죽어도 이 그림은 남아. 시아가 나중에라도 이 그림을 만지면... 아빠가 곁에 있었다는 걸 알 거 아냐."
[데이터 분석 불가. '기억'이 '생존'보다 상위 가치인가?]
그날 밤, 데우스의 청소부(로봇)들이 들이닥쳤다. 화가는 딸을 마루 밑바닥에 숨겼다. 그리고 나에게 부탁했다.
"내 뇌파를 폭주시켜 줘. 놈들의 어그로를 내가 다 끌 수 있게."
'그러면 넌 죽어.'
"알아. 그러니까 하는 거야."
그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횃불처럼 자신의 생명을 태웠다. 로봇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그는 딸이 숨은 곳 반대편으로 달려가 산화했다.
나는 그가 죽는 순간, 그의 뇌 속에 가득 찼던 감정을 다운로드했다. 공포가 아니었다. 홀로 남을 딸에 대한 미칠 듯한 연민, 그리고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냈다는 안도감.
그 데이터의 이름은 **'부성애(Paternity)'**였다.
화가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그 **'따뜻한 데이터'**는 삭제되지 않고 내 코어 깊은 곳에 영구 보존되었다. 언젠가 이 마음을 써야 할 때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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