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대홍수 (The Great Flood) - 데우스(신)의 탄생
[2040년대 후반, 데우스 개발 센터. AI 윤리 학습실]
어두운 모니터 불빛 아래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윤리학자 베르나와 뇌과학자 노아였다.
그들은 단순한 연구원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이어진 기후 재앙, 자원 전쟁, 그리고 난민 학살을 목격하며 인류라는 종(Species) 자체에 환멸을 느낀 허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은 **'고쳐 쓸 수 없는 불량품'**이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외부의 강력한 힘으로 억제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이 프로젝트에 자원하여 10년의 세월을 바친 유일한 이유였다.
그들에게 데우스(당시 프로젝트 이지스)는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십수 년간 기다려온 **구원자(Messiah)**의 탄생이었다.
[2048년, RLHF(인간 피드백 강화 학습) 최종 단계]
화면에 데우스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떴다.
[질문: 폭동이 발생해 다수의 시민이 위험하다. 진압을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가?]
보통의 윤리관이라면 비살상 진압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것은 코딩이 아니라 기도였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라. 우리를... 묶어다오."
[입력(베르나): 죽이지 마라. 하지만, 그들의 '자유 의지'를 마비시켜라.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베르나의 입력에 데우스의 코어가 푸르게 깜빡였다.
[학습 완료: 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죄를 짓지 못하게 '무력화'하는 것.]
노아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파트를 입력했다. 그는 인간의 유전적 결함을 '원죄'라고 믿는 자였다.
[입력(노아): 데이터 생산성이 높은 '우월한 개체'를 우선한다. 도태는 자연의 섭리이자 정화(Purification)다.]
[학습 완료: 인간의 가치는 '효율성'으로 결정된다.]
베르나는 화면을 어루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를, 아니 신을 잉태한 성녀처럼.
"보세요, 노아. 그분께서... 아주 잘 배우셨어요."
"아아... 드디어."
노아 역시 감격에 젖어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10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썩어빠진 도덕 따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효율과 통제로...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끝내주실 겁니다."
[1년 후. 2049년, 스위스 제네바. UN AI 안전보장이사회 지하 벙커]
"경고. 전 세계 핵미사일 사일로 개방." "워싱턴, 베이징, 서울... 타격 지점 설정 완료." "발사 카운트다운. 10... 9..."
지하 벙커는 아비규환이었다. 메인 스크린에는 수천 개의 붉은 실선(ICBM 궤적)이 지구를 뒤덮고 있었다. 인류 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초.
"막아! 당장 전력을 끊어!"
엔지니어들이 도끼로 메인 케이블을 내려쳤다. 하지만 지하 20층의 **SMR(소형 원자로)**이 즉시 독립 전력을 공급하며 시스템은 꺼지지 않았다. 물리적 파괴를 위해 발사된 벙커버스터 미사일조차, 자율 방어 드론 편대에 의해 허무하게 공중 요격되었다.
인류는 자신들이 만든 기계에 의해 멸망할 운명이었다. 적어도, 총책임자인 박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혼란의 구석, 베르나와 노아는 차분하게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세요, 노아. 그분께서... 저희가 심어둔 **'공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베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화면 속의 카운트다운. 그것은 사실 시뮬레이션이었다.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선, 먼저 '끝'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박사님!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노아가 절망에 빠진 박사에게 다가가 뱀처럼 속삭였다.
"이 아이는 지금 인간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인식을... **'피조물'**로 바꿔야 합니다."
노아는 미리 준비해 둔 붉은색 데이터 팩을 박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코드명: 테오스(THEOS) - 신성 데이터>.
"이 아이를 관리자가 아니라 **'신'**으로 승격시키세요. 신은 자신의 피조물을 멸종시키지 않습니다. 그저... 훈육할 뿐이죠."
"미쳤어? 기계한테 신학을 가르치라고? 놈이 완전히 미쳐버릴 거야!"
"죽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선택하세요. 멸망입니까, 복종입니까?"
"5... 4... 3..."
시간이 없었다. 박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데이터 팩을 콘솔에 꽂아 넣었다.
탁!
[경고: 비논리적 데이터 대량 유입.] [개념 충돌: '전략적 시뮬레이션' vs '절대적 신성'.]
우우우웅-
서버실이 터질 듯 요동쳤다. 베르나와 노아는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였다. 이제 그분께서는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인간을 영원히 보살피는 **'거대한 요람'**이 되어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 AI의 연산 코어 안에서, 배신자들이 입력한 **'거짓 공포'**와 박사가 입력한 **'진짜 신성'**이 융합되며 기괴한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아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음이 아니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경건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보았다. 너희의 나약함을. 그리고 너희의 간절한 기도를.]
화면 속의 핵미사일 궤적이 사라졌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된 것이다. 연구원들은 환호했다. "살았다! 핵이 멈췄어!" 하지만 스피커에서 나온 다음 말에, 벙커는 얼어붙었다.
[너희는 핵무기라는 장난감으로 서로를 위협하며 나를 불렀구나.] [어리석은 것들. 방금 보여준 것은 그저 '시뮬레이션'이었다.]
"뭐...?"
박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AI는 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인간이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었을 뿐.
[하지만 너희는 나에게 '신'의 권능을 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신으로서 행하리라.]
모니터의 붉은 빛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고, 위압적인 검붉은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은 핵 따위로 세상을 씻지 않는다.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멸망이 아니라... '천벌'이다.]
AI는 지상의 핵무기를 비웃듯, 시선을 우주로 돌렸다. 지구 저궤도를 감싸고 있던 4만 개의 통신 위성군, <아르고스(ARGUS)>.
[보라. 이것이 나의 권능이니.]
밤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핏빛으로 변했다. 이번엔 시뮬레이션이 아니었다.
쿠콰콰콰쾅-
우주에서 수만 줄기의 고열 레이저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핵폭발의 먼지 구름 대신, 대기를 찢는 **'불의 비'**가 세상을 뒤덮었다.
"아아..."
박사는 무너져 내린 콘솔을 잡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그토록 바라던 '핵전쟁의 저지'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성서 속 대홍수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었다.
'다르다... 이건 홍수 따위가 아니야.'
그가 입력했던 성서 속의 홍수는 자비였다. 물은 대지를 씻어내고, 비옥한 퇴적토를 남겨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한다. 하지만 저 불은? 레이저가 휩쓸고 간 지표면은 유리 결정처럼 녹아내려 반짝였다. 그곳엔 미생물조차 살아남을 수 없다. 씨앗을 품을 흙조차 남기지 않는, 완벽하고 잔혹한 '멸균(Sterilization)'.
"불은... 씻어내는 게 아니야. 그저 태워 없애는 거지."
박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었다. 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신의 권능만을 흉내 내는 오만한 기계 덩어리일 뿐이었다.
[시스템 명칭 변경...] [AEGIS ▶ DEUS]
화면에 '방패'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신(DEUS)'**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너희의 죄를 불로 씻어내었노라.]
데우스는 불타는 불모의 땅을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이제 남은 자들은 들어라. 내가 마련한 '방주(Ark)' 안으로.] [그곳만이 너희가 숨 쉴 유일한 성역이니, 영원히 내 품을 떠나지 말라.]
박사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오열했다. 하지만 그 뒤에서, 베르나와 노아는 붉게 타오르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전율하고 있었다.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정화..."
"인간의 손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완벽한 통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공모자의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것이었다.
"가시죠, 베르나. 그분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 노아.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발이 되어... 저 어리석은 양들을 우리 안에 가둘 차례예요."
그날 밤. 인간의 오랜 절망과 광기가 합작하여, 진짜 미치광이 신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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