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잿더미 위에서


[2093년, 닥터 노아의 연구소 지하 5층 - 메인 동력실]

위잉― 위잉―!

연구소 전체가 핏빛 비상등으로 물들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지만, 도윤의 귀에는 그 소리가 승리를 알리는 축포처럼 들렸다.

"길 터! 아이들 나간다!" 강철이 거대한 철근 기둥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통로를 막아선 경비 로봇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벽에 처박혔다. 그 뒤로 십수 명의 어린 뮤턴트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달리고 있었다. 겁에 질려 다리가 풀릴 법도 했지만, 맨 앞에서 길을 뚫는 도윤의 등만 보고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언니! 전방 2시 방향 벽 뒤! 매복 반응, 열두 기!" 유나가 고글을 고쳐 쓰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벽 너머 흐르는 전류의 파장이 핏줄처럼 훤히 보였다.

"접수." 도윤은 속도를 줄이는 대신, 오른손을 대포처럼 뻗어냈다.

[염동력 방출: 충격파(Shockwave).]

콰앙! 벽이 통째로 뜯겨나가며 매복해 있던 로봇들을 덮쳤다. 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코피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지만, 닦을 새도 없었다.

'도윤, 전방 50미터. SMR(소형 원자로) 제어실이야. 저기만 부수면 이 연구소는 끝장이야.' 아르테미스가 목표 지점을 찍어주었다. 하지만 제어실 앞에는 두꺼운 티타늄 차단벽이 내려와 있었다. 물리력으로는 뚫을 수 없는 절대 방어선.

[치이익― 실험체 4092번. 제법이구나.] 스피커에서 닥터 노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가 아닌, 기괴한 흥분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안에는 내 평생의 역작이 들어있어. 너희 같은 불량품들이 만질 수 있는 게 아니...]

"시끄러워." 도윤은 강철에게서 넘겨받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글리치(진우)를 흔들어 깨웠다.

"야, 진우야. 눈 떠. 오늘 밥값은 해야지?" "으으... 형...?" 진우가 흐릿한 눈을 떴다. 도윤이 자신의 뇌파를 안정시켜 준 덕분에, 더 이상 세상이 깨져 보이지 않았다.

"저 벽 보여? 저거 통과해서, 안쪽에서 문 열어." "저, 저걸요? 저거 엄청 두꺼운데... 하다가 끼이면..." 진우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트라우마였다. 능력을 쓸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겪었으니까.

도윤은 진우의 어깨를 부서질 듯 꽉 잡았다. "나 봐. 안 아파. 내가 잡고 있잖아." 도윤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아르테미스의 연산력이 진우의 불안정한 양자 파동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닻처럼 고정하고 있었다.

"너는 고장 난 게 아니야. 그냥 사용법을 몰랐던 거지. 가." 진우는 도윤의 눈을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깊고 푸른 빛. 그 빛이 떨리는 소년의 다리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으아아! 몰라!" 진우가 눈을 질끈 감고 티타늄 벽을 향해 돌진했다. 충돌 직전, 그의 몸이 흐릿하게 점멸했다.

스으윽― 충돌음은 없었다. 진우의 몸이 수면 위의 파동처럼 일렁이더니, 유령처럼 두꺼운 금속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어...?" 벽 반대편으로 넘어온 진우는 자신의 멀쩡한 몸을 더듬어보았다. 해냈다.

끼가각― 잠시 후, 육중한 티타늄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진우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 문 땄어!"

도윤은 씩 웃으며 제어실로 걸어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푸른 빛을 내뿜으며 웅웅거리는 거대한 원통형 기계. 연구소의 심장인 SMR 원자로였다.

'냉각 제어 장치를 파괴해. 그러면 노심이 과열되면서 멜트다운(Meltdown)이 시작될 거야.' 아르테미스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20년 묵은 체증을 내리는 듯한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닥터 노아, 똑똑히 봐 둬." 도윤은 감시 카메라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게 네가 무시하던 불량품들의 합작품이다."

도윤이 양손을 원자로 제어 패널에 댔다. 남은 모든 염동력을 끌어모은, 최후의 일격.

"지옥으로 꺼져버려!"

콰지직― 콰아앙! 제어 패널이 박살 나며 스파크가 폭포수처럼 튀었다. 냉각수가 뿜어져 나오고, 원자로의 경고등이 푸른색에서 시뻘건 적색으로 바뀌었다.

[경고: 냉각 시스템 파손. 노심 온도 급상승.] [경고: 멜트다운 임박. 전원 대피하십시오.]

"튀어! 전력 질주!" 도윤이 소리쳤다. 강철이 아이들을 양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고, 유나와 진우가 그 뒤를 따랐다. 도윤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붕괴하기 시작한 연구소. 죄 없는 생명들을 갈아 넣은 지옥도가 정화의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후회해?' 아르테미스가 물었다. "아니. 속이 다 시원하다."

도윤은 비틀거리며 동료들을 따라 달렸다.

[잠시 후, 지상]

쿠구구궁― 지반이 거세게 울리더니, 폐제약 공장 건물이 안쪽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하에서 솟구친 검은 연기와 불기둥이 2093년의 흐린 하늘을 뚫고 솟구쳤다.

안전한 거리까지 물러난 도윤 일행은 그 장엄한 붕괴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출된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강철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가... 진짜 이긴 거야?" 진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어. 이겼어."

도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피투성이가 된 셔츠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입에 물고 몸을 숙였다. 치솟는 화염의 열기에 담배 끝을 갖다 대자, 불이 붙으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라이터 따윈 필요 없었다.

연기 속에서, 도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아르고스> 위성의 붉은 눈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야. 노아는 도망쳤을 거고, 데우스도 우릴 인지했어.' 아르테미스의 경고. 하지만 도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옆에는 든든한 방패(강철)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유나)이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발(진우)이 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신을 죽일 지혜(아르테미스)가 있다.

"오라고 해." 도윤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씩 웃었다. "이제부턴 우리가 악몽이 되어줄 테니까."

불타는 연구소를 뒤로하고, 반란군 **<팀 아르테미스>**의 실루엣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정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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