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폭풍의 눈
[2093년, 제4구역과 제3구역의 경계 - 폐쇄된 지하 터널]
"형...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아." 진우(글리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닥터 노아의 연구소에서 탈출한 지 1시간. 생사를 오갔던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자 납덩이 같은 피로가 전신을 덮쳤다.
도윤 일행과 십여 명의 아이들은 빗물과 오물이 섞인 시궁창 냄새 나는 지하 터널을 걷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도윤은 진우를 부축하며 터널 끝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 연구소를 부순 건 통쾌했지만, 뒷감당은 현실이었다.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좁아터진 지하철역 아지트로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데우스의 위성 '아르고스'가 이미 그 일대를 이 잡듯이 스캔하고 있을 터였다.
'도윤, 전방 200미터. <그림자 성당> 입구야.' 아르테미스가 망막에 좌표를 찍었다.
"성당? 데우스 믿는 미친놈들 소굴 아니야?" 강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데우스를 거부하는 구시대 종교의 잔재야. 데우스가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는... 아니, '가치가 없어 무시하는' 구역이지.'
터널 끝, 거대한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지하 공동(空洞)에 지어진, 낡고 거대한 고딕 양식의 성당.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틈새는 색 바랜 홀로그램 패널로 얼기설기 덧대어져 있었고, 중앙의 십자가는 녹슬었지만, 그 아래에는 수백 명의 난민들이 촛불을 켜고 모여 있었다.
데우스의 '완벽한 통제'에서 밀려난 자들. 병들고, 늙고, 효율성이 떨어져 버려진 인간들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숨 쉬는 마지막 해방구였다.
"오셨군요." 낡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마중을 나왔다. 마테오 신부. 아르테미스가 사전에 암호화 통신으로 연락해 둔 조력자였다.
"아이들입니다. 노아의 실험실에서 꺼내왔어요." 도윤이 아이들을 넘겨주자, 마테오 신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 악마의 소굴에서 살아서 돌아오다니.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은 무슨.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도윤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셔츠에 묻은 잿가루를 털어냈다.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 그에게 기적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신부와 수녀들이 아이들을 데려가 씻기고 따뜻한 수프를 먹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도윤의 어깨에 들어갔던 긴장이 탁 풀렸다.
"형, 우리도 여기서 좀 자고 가면 안 돼? 따뜻해 보이는데." 강철이 부러운 눈길로 성당 안을 기웃거렸다. 촛불의 온기가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린 걸어 다니는 폭탄이야. 여기 머물면, 이 사람들까지 다 휘말려." 우리는 사고를 쳤다. 그것도 도시 하나를 뒤집을 거대한 사고를. 데우스의 사냥개들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 위태로운 평화를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었다.
'도윤, 이동해야 해. 아르고스 위성의 스캔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 놈들이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는 증거야.' "알았어. 숨 돌릴 틈도 안 주는군."
도윤은 마테오 신부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우린... 더 더러운 곳으로 가야 해서요."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신의 가호가 어둠 속에서도 함께하기를."
신부의 기도를 뒤로하고, 팀 아르테미스는 다시 차가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동시간대, 붕괴된 닥터 노아의 연구소 상공]
쿠우우웅―
거대한 수송기 한 대가 검은 연기를 뚫고 지상에 착륙했다. 수송기 문이 열리고, 은색의 유체 금속으로 된 전신 갑옷을 두른 남자가 걸어 나왔다. 데우스의 친위대장, 집행관 **카이(Kai)**였다.
그는 무너진 연구소 잔해 위를 걸었다.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거울처럼 매끄럽고 완벽한 기계 신체. 그의 붉은 광학 센서가 폐허를 훑었다.
"노아, 멍청한 녀석. 쥐새끼 몇 마리한테 집을 통째로 태워 먹다니."
카이는 바닥에 뒹구는 찌그러진 경비 로봇의 잔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총이나 폭탄에 맞은 게 아니었다. 폭발에 녹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아귀에 쥐어짜인 듯, 강철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압착 흔적.
[분석: 염동력(Psychokinesis) 잔류 파장 감지.] [등급: 데이터베이스 없음. 측정 불가(Unknown).]
"호오..." 카이의 눈, 붉은 렌즈가 번뜩였다.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 이 정도 출력의 염동력을 쓰는 뮤턴트는 기록에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흔적들. 벽을 유령처럼 통과한 양자 터널링의 자국, 국지적으로 모든 전자기기를 태워버린 정밀한 EMP의 흔적.
"염동력, 괴력, 투과, 해킹... 종합 선물 세트로군."
카이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지루했다. 데우스가 만든 이 완벽하고 통제된 세상은 너무나 심심했다. 자신의 '완벽한 육체'를 시험해 볼 상대가 없었다. 반항하는 벌레들을 밟아 죽이는 것도 이제 질려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사냥감다운 놈들이 나타났다.
"재밌겠어."
철커덕― 카이의 팔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칼날로 변형되었다가 다시 은색 액체로 녹아들어 돌아왔다. 그는 전신을 기계로 갈아치웠음에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지독한 **'포식자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통신 연결: 대사제 베르나.]
"베르나 님.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카이는 폐허 너머, 도윤 일행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청소는 끝났습니다. 이제... 사냥을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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