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압도적인 벽 (The Wall)
[2093년, 폐쇄된 지하 터널 출구 인근]
"형! 저기 빛이 보여! 출구야!"
강철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저 멀리 녹슨 빗살무늬 하수구 철창 사이로, 구원과도 같은 희미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도윤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등 뒤의 진우(글리치)를 추어올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 같았지만, 희망이 보였다.
콰아앙―!
하지만 그 가녀린 희망은, 천장을 찢는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출구 쪽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퇴로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자욱한 먼지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은색의 유체 금속 갑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데우스의 집행관, 카이(Kai).
"숨바꼭질은 끝났다. 쥐새끼들."
카이는 여유롭게 걸어오며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철렁. 그의 손이 거대한 칼날로 변형되더니, 옆에 있던 굵은 철근 기둥을 마치 연두부 썰듯 소름 끼치게 부드럽게 베어버렸다.
"젠장..." 도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생존 본능이 사이렌처럼 울려 댔다. 저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재앙이다.
"강철아, 유나야... 내 뒤로 물러서." 도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강철은 듣지 않았다.
"우리 형 괴롭히지 마!" 강철이 고함을 지르며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거구의 몸이 성난 탱크처럼 돌진했다.
"비켜라, 고철." 카이는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등으로 가볍게 툭 쳤다.
퍼억! 그 가벼운 동작 한 번에, 강철의 거대한 몸이 보이지 않는 충격파에 맞은 듯 십 미터 밖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크헉...!" 강철이 피를 한 뼘이나 토하며 그대로 기절했다. 단 한 방이었다.
"강철아!" 도윤은 비명을 질렀다. 공포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하얗게 질렸다.
'도윤. 도망쳐.'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뇌를 때렸다. 평소의 침착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승률 0%. 진우를 버려. 무게를 줄여야 너라도 살 수 있어.'
"미친... 소리... 마..." 도윤은 깨질 듯이 떨리는 턱관절을 악물며 거절했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진우를 버리고 혼자 살면, 평생 자신을 쓰레기라 여기며 살다 죽을 것 같다는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다.
"호오? 동료를 챙기시겠다? 주제도 모르는군."
팟. 카이가 잔상만 남긴 채 순식간에 눈앞으로 이동했다. 도윤이 반응하기도 전에, 카이의 차가운 금속 손이 도윤의 목을 졸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커억...!" 도윤의 두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너 같은 불량품을 '리더'랍시고 믿고 있는 저것들이 불쌍하군. 너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
카이의 손아귀 힘이 유압 프레스처럼 강해졌다. 경동맥이 눌리고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아르테미스가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카이의 압도적인 출력 앞에선 얇은 유리막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도윤! 정신 차려! 뇌파가 끊어지고 있어!'
"으으윽..." 도윤은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무력했다. 영웅? 구원자? 다 개소리였다. 자신은 그저 힘센 괴물 앞에서 캑캑거리는 19살짜리 꼬맹일 뿐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도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르테미스... 살려줘... 제발...'
'......하아.' 아르테미스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스승으로서 내리는 최후의 결단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네 뇌가 타버릴 수도 있어.'
'상관없어... 뭐든 해!'
아르테미스는 도윤의 뇌 리미터를 강제로 해제했다. 공격용이 아니었다. 카이를 때려봤자 흠집도 안 날 테니까. 목표는 머리 위, 낡아빠진 천장이었다.
[시스템 경고: 안전장치 해제. 염동력 폭주(Psychic Overload).]
도윤의 눈에서 시뻘건 핏발이 섰다. 그는 카이를 공격하는 대신, 터널을 지탱하고 있는 낡은 지지대를 향해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다... 무너져라!!"
쿠쿠쿠쿠쿵! 도윤의 절규와 함께 터널의 천장이 비명을 지르며 붕괴했다. 수백 톤의 바위와 흙더미가 카이와 도윤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귀어진(同歸於盡). 나도 죽고 너도 죽자.
"이 미친...!" 카이가 당황하여 도윤을 놓아주고 급히 위를 방어했다.
그 틈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도윤은 네 발로 기어서 진우의 멱살을 잡았다.
"뛰어...!"
도윤은 유나를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것은 영웅의 멋진 퇴장이 아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에 찍혀 피를 철철 흘리며, 개구멍 같은 틈새로 짐승처럼 기어나가는, 비참하고 처절한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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